아무튼, 예능

🔖 인간이 뜨겁거나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진짜 소리를 질렀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배운 생활 지식이다. 나는 차가운 물, 그것도 얼음을 가득 넣은 물을 어떤 음료수보다도 좋아했는데, 가뜩이나 내가 하는 모든 걸 세상이 저지한다고 생각할 무렵이라 저 얘기를 듣자마자 진절머리를 쳤다. 하다하다 물 처먹는 거로도 나를 반대하려고 하는구나! 분했다.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나한테 해롭지?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면 인내하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행동하고, 반성해야 하지? 어른이 되면 내가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선택한 것들이 다 옳은 것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정말 신기한 지혜와 현명함이 나에게 저절로 주어질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판단하고, 적응하고, 때로는 참아내는 능력을 기르지 않았다. 살다 보면 나에 대한 나의 믿음도 그냥 자연스럽게 깊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 아무것도 훈련되지 않고 할 계획도 없는 자신을 향해서 계속 믿는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이 말 하나로 나는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승인하고 스스로를 자주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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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하루' 같은 것은 어쨌든 내 상상 속 목표니까 한번쯤 실행해볼 만한 일이겠지만 내 일상의 풍경이 될 순 없을 것이다. 기적의 졸부가 되어 좋은 집을 산다 한들 기상 시간부터 글러먹었다. 전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지독하게 싫었다. 어떻게든 저 모형에 다가가고 싶었고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남들에게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숨겼고, 자책했고, 울었고, 화냈고, 자포자기했고, 결국 모든 것을 비아냥대며 자조에 빠졌다. 저게 다 각각의 독립된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처럼 전부 이어져 있단 사실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껍데기만 위대한 하루'를 내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욕망하고 거기에 맞게 노력하는 방법을 배웠어야 했는데 잘 안 됐다. 이제 크게 바라는 건 없다. 진짜 성취감을 느껴보고 싶다. 거창한 말들에 속지 않고 매일 무언가가 쌓이고 걸러지는 '그저 그런 하루'가 필요하다.


💬 (예능을 좋아하지 않아서 한 권을 다 읽고도 예능과 별 상관없는 챕터가 제일 좋았다. 그 부분만 남겨둔다.)